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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끝나고 대학교에 가기 전 과외를 했었는데, 학생의 어머니와도 친해져서 수업 후에 밥도 주시고 차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었다. 마지막 수업 날이었나, 식사를 했었는데 그때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대학교에 가서 연애를 하게 되거든, 이 사람과 결혼해서 살면 어떨까 꼭 상상해 보라고. 그 상상 끝에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연애하기에도 좋은 사람은 아닐 거라고 하셨다. 왜인지 그 말이 마음이 남아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이 사람과 결혼하면 어떨까 생각해 봤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마지막 남자친구 (현 남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상상 속 결말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이런 상상이 괜찮았을 관계도 그르쳤던 적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안전장치 같은 것이었다. 상상은 상상이고, 연애는 연애, 결혼은 결혼이지만, 적어도 정말 엉망진창인 사람과 연애로 엮이는 일은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삼스레 왜 이때의 이 대화가 생각났냐면, 여행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여행은 어떤 곳을 짧게 스쳐 지나가는 곳이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어딘가 여행을 가면 이곳에서 아주 정착해 살게 되면 어떨까를 상상한다. 여기서 살면 어떨까, 이런 곳에서 일상을 보내는 건 어떤 모습일까, 이곳은 나를 어떻게 바꿀까 하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생각해 보게 된다. 레스토랑에서 주문을 받으며 나를 쳐다보는 직원의 눈빛에서, 카페에서 커피를 건네주는 바리스타의 표정에서 미루어 짐작해 본다. 이곳에 이사를 오게 돼서 여행객이 아닌 주민으로 사는 건 어떤 삶일까.

그리고 3일째, 내가 이 곳에서도 할 수 있는 내 일이 있으면 (지금 하는 일을 리모트로 여기에서 할 수 있거나, 어떤 다른 방법으로든 일정 수입을 창출할 수 있으면) 비셰노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론세스톤은 어떻다 할 인상을 받기도 전에 금방 떠나야 했었고, 세인트 헬렌스에서는 MinT Gallery라는 너무 멋진 샵이 있기는 했지만 그곳 말고는 죽어가는 동네라는 느낌밖에 받지 못했다. 일요일에 문을 닫는 곳이 너무 많아 거리는 조용했고, 팔려고 나와 있는 집들이 너무 많았다. 약간 실망을 안고 다음에 도착한 곳이 비셰노여서 그랬는지, 이 작고 조용한 동네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비셰노는 작지만 귀여운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슈퍼마켓도, 레스토랑도 각자의 자리에서 손님들로 북적이고, 블로우홀도 키아마나 다른 곳들에 비하면 너무 귀여운 크기였지만 쉴 새 없이 첨벙거렸다. 작은 동네에 숙소와 카페와 코인 세탁방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것도 귀엽고. 이곳도 세일이 나와 있는 집들이 종종 있었지만 세인트 헬렌스만큼은 아니었고, 동네 전체에 어떤 바이브가 있었다. 이곳에서 글을 쓰면서 혹은 다른 일을 하면서 살면 평화롭고 좋지 않을까, 내 마음도 즐겁고 편안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같은 것을 느꼈다.
처음 이민을 생각하고 준비했을 때도 비슷한 상상을 하며 나라를 정했다. 미국? 총 맞을 것 같아. 아플 때 병원에 못 가면 어떡해? 한국에서 일하는 거나 미국에서 일하는 거나 비슷하지 않을까? 캐나다? 미국보다는 낫겠지만 미국이랑 비슷하게 시차가 있을 테니 한국에 있는 가족이랑 연락하는 게 힘들지 않을까? 호주? 1년 있어 보니 (남편이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1년 정도 살았었다) 그럭저럭 괜찮던데 지금 가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 그럼 호주. 결정 끝. 우리는 큰 결정을 아주 쉽게 하는 편이어서 어느 나라로 이민 갈지 정하는 데 10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비셰노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이곳을 돌아본 지 30분 정도 만에 했던 것 같다. 멜번의 삶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아주 옮겨오는 것도 괜찮겠다는, 뭐 그런 생각.
누군가가 여행은 집에 돌아가기 위해, 집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점에도 온 마음을 다해 동의하지만, 나에게 여행은 또 다른 집을 만들 가능성을 살펴보기 위한 과정인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살면 어떨까, 이곳에서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상상하면서, 내가 여기 사는 사람이라면 처음 보는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보일까 또 상상해 보는 것. 로컬들에게는 보이지만 관광객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은 뭐가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 그게 여행의 묘미 아닐까.
타즈매니아 여행 2주 동안 여기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은 비셰노와 스트란 정도였던 것 같다. 스쳐 가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으로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 곳.
